신고전주의의 배경과 특징
1750년을 전후로 서양미술사에서는 신고전주의 양식이 나타나 프랑스 혁명기 동안 전유럽에서 유행했습니다. 신고전주의는 앞선 바로크와 로코코의 현학적인 기교에 대한 미학적 반발로 등장하면서 고대, 특히 고대 로마 미술에서와 같이 형식과 내용의 통일성과 명료성을 강조했습니다.
신고전주의가 유럽 전역에 급속히 확산되는데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수백 년 동안 화산재 속에 덮여 있던 고대 도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발굴입니다. 많은 유럽인들은 상상으로만 그리던 고대 도시의 모습을 직접 경험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향했고, 부유한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유서 깊은 도시를 방문해 그곳의 문화와 역사를 현장에서 체험하고 익히는 이른바 그랜드 투어가 유행했습니다.
바로크적 미술 취향을 밀어내고 신고전주의가 싹을 틔운 것은 18세기 중반입니다. 이 양식이 번창했던 것은 초기 혁명기에서부터 나폴레옹 시대까지 다다르는데, 1800년경 낭만주의 미술과 일정 기간 공존하다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 김석모의 미술사 기행-
고대적인 모티브를 많이 사용하고 고고학적 정확성을 중시하며 합리주의적 미학에 바탕을 둡니다.
신고전주의 예술은 형식의 정연한 통일과 조화, 표현의 명확성 형식과 내용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며, 특히 미술에서는 엄격하고 균형 잡힌 구도와 명확 간 윤곽, 입체적인 형태의 완성 등이 우선시 됩니다. 주제면에서는 희생, 애국 등 교훈적 내용을 담습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
1789년 발발한 프랑스 대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를 기치로 귀족 중심의 봉건 체제와 전제주의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와 근대 자본주의의 길을 연 혁명입니다. 혁명의 예술적 강령을 온몸으로 실천한 화가가 바로 신고전주의의 지도자 자크 루이 다비드입니다.
1. 헥토르의 죽음을 슬퍼하는 안드로마케(Andromache Mourning Hector) - 1783년
‘일리아드’의 한 장면으로 트로이 전쟁에서 아킬레우스에 의해 살해된 남편 헥토르의 시신 앞에서 애통해 하는 아내와 아버지를 잃은 아스티아나스가 슬퍼하는 어머니를 위로하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2.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Oath of the Horatii) - 1784년
신고전주의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호라티우스 삼 형제가 공화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하며 경례하는 로마 신화의 한 장면입니다.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 왕정을 무너뜨리려는 프랑스의 공화주의자들이 로마 공화정을 동경하고 있었고, 또 시민혁명의 분위기를 드높이려면 애국심의 고양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실제 이 작품은 예술적 성취면에서 대단한 찬사를 받았던 것은 물론, 공화주의적 가치관으로 엄청난 호평을 받았습니다.
프랑스혁명(1789)
“공화국을 위해 흩어지지 말고 단결하라. 자유와 평등, 박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프랑스 대혁명은 1789년 5월에 삼부회의 소집으로 시작하여 1799년 11월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구데타로 끝나는 10년의 기간을 일컫습니다.
5월 삼부회 소집
- 누적된 적자와 미국 독립 전쟁 시기 식민지 독립군에 대한 원조로 재정적 위기가 발생하자 과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합니다.
* 삼부회: 프랑스의 신분제 의회로 중요 의제를 논하였습니다. 제1신분인 성직자, 제2신분인 귀족, 제3신분인 평민들의 대표로 구성되었습니다. 14세기 초에 처음 소집되어 정치적, 재정적 지원이 필요할 때 가끔 소집되었으나 1614년 이후에는 소집된 적이 없었습니다.
6월 국민의회 조직
- 프랑스혁명 촉에 제3신분의 평민 대표들이 삼부회를 대신하여 국민 의회를 구성하였습니다. 귀족대표들이 이를 거부하고 국왕이 압박을 가하면서 회의 장소를 폐쇄하자 제3신분 대표들은 회의장에서 나가 왕국 실내 테니스 코트에 모여 새로운 헌법이 마련될 때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였습니다.
* 프랑스혁명의 배경: 제3신분인 평민은 봉건적 의무와 과중한 세금 부담, 정치적 권리를 누리지 못해, 구제도의 사회적 모순에 불만이 있었습니다.
7월 바스티유 감옥 습격
- 루이 16세가 국민 의회를 무력으로 진압하자 파리 시민은 정치범을 가두는 등 전제 정치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습니다. 이는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8월 인권선언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 “주권은 왕이 아닌 국민의 것이다."
3. 테니스코트의 서약(Tennis Court Oath) - 1791년
1791년 자코뱅당은 당대 최고의 화가이자 열렬한 혁명당원이었던 다비드에게 프랑스혁명의 기폭제가 됐떤 테니스코트의 서약을 기념할 역사화를 주문했습니다. 다비드는 수백명의 혁명당원들이 열렬히 환호하는 장면을 거대한 캔버스에 옮기기 위해 1년이 넘게 습작에 매달렸지만 이 작품은 끝내 미완성으로 남겨졌습니다. 요동치던 혁명 정국 속에서 그림에 등장하는 영웅들이 하루 아침에 역적으로 몰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4. 마라의 죽음(The death of Marat) - 1793년
다비드가 살해된 프랑스 혁명가인 장폴 마라를 그린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가장 유명한 프랑스 혁명의 그림 중 하나입니다. 샤를로트 코르데에 의해 살해된 후 1793년 7월 13일 욕조에서 죽은 채로 누워있는 마라를 묘사합니다.
5.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The Intervation of the Sabine Women) - 1799년
로마 1대 왕이 된 로물루스는 인구를 늘려 도시를 번성시키기 위해 이웃 도시 사비니 여성들을 납치해다가 로마 군인들과 강제결혼을 시켰습니다. 사비니의 여인들이 납치된 지 3년 후, 타티우스의 주도하에 사비니의 군대가 진격하여 로마인들 근거지인 카피톨리노 언덕을 포위하고 로마군과 대치하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서로에게 창과 칼을 겨누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용감하게 서서 두 팔을 벌리고 그들을 저지하고 있는 한 여인을 볼 수 있는데, 그녀가 바로 헤르실리아입니다. 그녀는 아버지와 남편에게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의 아내이자 또 어머니이기도 한 여인들을 데려가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비록 원수가 되었을지언정 모두가 친족의 연을 맺게 된 상황을 호소하며 전쟁을 중단하고 평화를 영위할 것을 간청하고 있습니다. 헤르실리아를 비롯한 사비니 여인들의 필사적인 노력과 중재로부터 양측은 전쟁을 중단하고 협정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 그림은 나폴레옹이 집권한 해입니다. 왕정이 무너진 뒤 들어선 공화국 정부가 분열을 거듭하다가 새로운 황제를 맞은 시기입니다. 혁명파의 대표 화가였던 다비드는 갈등을 봉합하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사비니의 여인들을 평화의 상징으로 내세웠을 것입니다.
6.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Napoleon Crossing the Alps) - 1801년
이 그림은 1800년에 나폴레옹이 북부 이탈리아를 침략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었던 사건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 그름은 나폴레옹 제국의 위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사납게 몰아치는 바람에 거칠게 나부끼는 말의 갈기와 나폴레옹의 망코는 그림에 웅장한 느낌을 부여합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화창한 날에 알프스 산을 넘어 진군했습니다. 또한 다비트는 표트르 대제의 기마상을 토대로 앞발을 들고 서 있는 말의 자세를 그렸지만 사실 나폴레옹은 노새를 타고 알프스 산맥을 넘었습니다.
7. 나폴레옹의 대관식(The coronation of Napoleon) - 1897년
나폴레옹은 제정의 영광을 기념하기 위해 네 개의 초대작을 명했는데, 다비드는 ‘생 드 마르스에서의 군기 수여식’과 ‘대관식’을 완성시켰습니다. 의식은 1804년 12월에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되었고, 로마에서 교황 비오 7세가 초청되었습니다. 황제는 월계관을 쓰고 앞으로 나와서 꿇어앉은 황후 조재핀에게 왕관을 주고 있습니다.
※ 출처 chedulife.com.au
한국일보 오피니언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작품 해석
정치적 관점을 회화에 직접적으로 반영했습니다.
연극적 요소로 엄숙하고, 비극적 분위기를 연출하는 구성에 능했고, 영웅주의, 충성을 작품의 주요 테마로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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